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황태곤 병원장) 개원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30일 병원 1층 로비에서 거행된다.
미래의학의 세계적 대가 3명을 초청하여 “Future Medicine(미래의학), 미래의학을 향한 서울성모병원의 비상”을 주제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는 손호영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다.
유전의학의 대가인 리차드 코튼 박사가 유전자 치료의 미래를, 줄기세포 연구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코니 이브스 박사가 줄기세포 발전양상과 양면성을, 교황청 생명학술원장이자 교황청 라테란 대학교 총장인 리노 피지켈라 대주교가 미래의학에 대해 강연한다.
이번 학술대회는 미래의학의 발전방향과 비전뿐만 아니라 과학발전에 따른 윤리적 이슈를 깊게 조명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어 국제학술대회 2부에서는 서울성모병원을 비롯한 5개 중점육성분야의 첨단 의료와 비전이 소개된다.
황태곤 병원장의 병원 소개를 시작으로 가톨릭암병원(전후근 암병원장), 조혈모세포이식(BMT)센터(민우성 센터장), 심혈관센터(승기배 센터장), 장기이식센터(양철우 센터장), 안센터(주천기 센터장) 발표가 진행된다.
한편 이날 개원식은 한승수 국무총리, 정진석 추기경(가톨릭학교법인 이사장), 박영식 가톨릭대학교 총장 등 각계 각층의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다.
다음은 논문 요약.
■유전자 치료의 미래(리차드 코튼)
유전성 질환의 존재는 이미 수천 년 간 알려져 있었으나, 그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세기였다.
그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는Cooper와 Krawczak(1993)[1]의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유전질환의 연구와 진단 및 치료는 항상 어려웠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유전질환에 있어서는 박테리아 감염에 대항하는 페니실린과 같은 마법의 탄환 같은 약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전질환에 있어 지난 20년 동안 학문과 과학적 탐구 활동이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증가하였다.
본 연자는 유전질환 연구의 역사와 현황을 간단히 고찰한 후 그 미래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인간의 유전질환은 비교적 흔하면서 일정 정도의 유전성을 내포한 질환과 단일 유전자 이상에 의해 뚜렷한 유전성을 나타내는 희귀 질환,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먼저 천식, 암, 정신분열 등과 같은 질환은 빈도가 비교적 흔하기 때문에 오늘날 유전질환 연구 분야에서 특히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 질환의 약 10%만 유전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막대한 비용을 투입한 대규모 연구들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유전적 변이들은 질환발생 위험을 경미한 수준으로 증가시키는 것으로 밝혀지는 등 그 결과는 그다지 극적이지 못하다.
향후 연구는 지금까지 발견된, 질병에 미치는 영향은 경미하나 비교적 흔한 변이들과 희귀한 변이들, 환경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맞춤의학(personalised medicine)이 점차 각광받고 있으나, 현재까지는 질환발생 위험도를 경미하게 증가시키는 변이들에만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유전질환은 원인을 알고 있으므로 병리기전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용이할 수 있으나 그에 대한 치료법은 거의 정립되지 않았다.
인간의 성장발달과 건강유지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약 2만여 개로 알려져 있으므로, 각각의 유전자가 불완전하여 질환을 야기시킨다는 가정을 하면 인간의 유전질환도 2만여 개에 이른다고 추정할 수 있다.
현재 각종 새로운 치료법들이 시도되고 있으며, 다가올 미래에 그 효과가 증명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질환과 연관된 유전자 이상, RNA 분자, 및 유전자 복제 수 변이 등을 찾아낼 수 있는 새로운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법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어 향후 새로운 기술과 연구를 통해 유전질환에 대한 지식이 증대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미래 의학(리노 피지켈라)
우리는 모두 미래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효과적이고 풍요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와 전통이 남겨준 유산을 이어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일찌기 알렉시스 드 토크빌(A. De Toqueville)은 1835년에 펴낸 자신의 유명한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1억5천만 인구가 모두 서로 평등하고 동일한 가족에 속하는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이들은 같은 출발점과 같은 문명, 같은 언어, 같은 종교, 같은 습관을 갖고 같은 복장을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같은 색깔을 띨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해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이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사실이다" (II, Concl.). 오늘날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모호한 말이 우리에게 던지는 여러 가지 도전은 오랜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도시에 모여 살고 도시들은 대동소이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작아지고, 단조로워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공통된 독창성과 독특한 전통을 서로 결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강함과 약함을 갖고 온 세상에 퍼져 살고 있습니다. 미소와 눈물은 특별히 문화적 의미를 갖지 않고, 다만 인간만이 지닌 마음과 정서의 힘을 보여줍니다.
저는 점장이가 아닙니다. 그저 공부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저에게 맡겨진 "의학의 미래"라는 주제에 관하여, 저는 의학이 건강의 가치를 바라보는 방식과 그것을 보다 나은 방식으로 바라볼 능력의 관계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건강에 덧씌워진 "권력"과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전에 없이 복잡한 문화적 변화를 겪고 있는 우리 시대에 권력과 건강의 관계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선 ‘건강의 권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이루어낸 성취입니다. 그리고 ‘건강에 대한 권력’도 있습니다. 문화, 사회, 정치, 교회 등 삶의 여러 분야에서 이 권력을 갖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든지 분명한 것은 권력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누구나 당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인류 역사에서 특별히 위기를 맞은 우리 시대에 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반론의 여지없이 인간의 생존 자체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력을 쟁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쟁취한 권력이 오히려 인간 자신을 굴복시키고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깊은 분별력을 가지고 이 권력을 다루어야 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진보하여 자연과 피조물 안에 깊이 숨겨진 신비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기뻐할 일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변형시키고 여러 요소들간의 관계와 조건들을 조작할 수 있게 된 이 능력에 힘입어, 인간은 자신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에너지를 감지하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부여 받고 사용하도록 부름 받은 이 권력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창세기의 첫 장부터 성경의 저자는 자연에 대하여 행사하도록 부여받은 이 권력이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임을 말해줍니다. 인간은 이 권력을 행사할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권력의 주인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권력을 나누어 받아 피조물에 대한 책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본래의 질서를 보존하고 이미 정해진 최종 목적에 도달할 수 있기 위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창세 1,28 참조)가 완전히 독립적으로 행사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긴밀한 관계 안에서 행사되어야 합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부여받은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점점 더 자신을 알아 갑니다.
고대에는 이런 관계가 강했고, 그 시대의 특징은 바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 및 자연을 감히 침범할 수 없다는 의식이었습니다. 반면에 근대의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 안에 자신의 힘을 새기는 일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미래에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자연은 여전히 인간이 자신을 변형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인간과 인간의 무례함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오늘날 인간의 상식 안에, 침해할 수 없고 실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런 맥락에서 이카루스의 신화를 잠시 기억해 보는 일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카루스와 그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는 갇혀 있던 미궁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날개를 만듭니다. 젊은 이카루스는 하늘을 나는 기쁨에 사로잡혀 점점 더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날개가 밀랍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태양을 향해 날아갔고 이전까지 상상도 하지 못한 위험을 무릅쓰는 매력을 만끽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자신을 죽게 했습니다. 미궁 속에 갇혀 있던 아들을 해방시켜 잠시 기뻐했던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그를 외쳐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이달로스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당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자연은 영혼이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은 그 자신 안에 창조주가 부여한 질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질서는 발전하도록 부여된 것이지, 변형되도록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갖게 된 권력은 인간 자신을 창조주의 지위로 들어높여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복을 향한 매력은 해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정복은 그 자체로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맺어져 있던 관계를 변질시킵니다. 이카루스의 신화를 하나의 표본으로 삼아 성찰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갖는 권력은 참여하는 권력입니다. 이 권력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 우월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 인간이 결코 전복시킬 수 없는 자연의 보다 넓은 흐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권력이 커질수록 그 권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도록 부름 받은 보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의학이 가진 권력에 대한 분별과 균형이 없이는, 의학이 인류의 진보와 문명에 봉사한다는 생각은 한낱 환상일 뿐입니다. 생명 유지라는 자연적 필요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하는데 사용할 새로운 수단을 계속해서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단을 사용하는 일은 인간의 필요와 그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이 가진 성격에 대하여 숙고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 새로이 이룩한 발견에 대하여 그 효과뿐만 아니라 그 발견의 필요성과 선함도 평가하는 윤리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정복은 어떤 것이든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현혹시킬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얻은 권력은 분명 어떤 권위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어떤 문화적 한계를 갖지 않는다면 그 권력은 인간을 타락하게 할 뿐입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권력과 그 권력을 행사하는 일은 인간 창조 활동의 발달에 기여합니다. 그러나 여러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그 권력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고, 따라서 참된 분별을 위한 규범을 찾는 윤리적 성찰의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측면은 우리로 하여금 이중의 결합을 깨닫게 해줍니다. 하나는 피조물을 형성하고 지배하는 인간 활동 에너지의 발견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식 및 자기 행동의 목적과 한계를 정하는 원칙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것이 자기의식의 과정이며, 자기의식은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책임의 원칙은 우리의 미래를 보다 선명한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근본 요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시대가 책임의 원칙에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 관련하여, 과학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이해하는 일은 의심의 여지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과학이 건강에 대하여 갖는 권력, 광범위한 실험의 힘을 통해 드러나는 이 권력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건강과 복지라는 과학의 목표는 하나의 원칙이 되고, 진보의 표징으로서 결코 억제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없이 과학이 이미 지니고 있는 권력 외에, 과학의 움직임과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요구하는 일은 우리 사회 전체가 반드시 맡아야 할 임무입니다. 인간 수정란에 대하여 갈수록 자주 행해지는 야만스런 실험은 과학이 지닌 야누스의 얼굴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과학에 다시 맑고 친절한 얼굴을 선사해 주는 일은 결코 늦출 수 없는 우리의 과제입니다.
이 과제는 과학이 인간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식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연을 거슬러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어떤 문화 안에서든 지혜롭고 성실한 성찰을 통해 우리는 이런 권력이 지닌 위험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에 악한 것이 있다는 말은 진보를 가로막기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매일의 생활에서 체험하는 사실입니다. 권력은 교만과 오만으로 인해, 그리고 규범을 무시함으로써 타락합니다. 반면에 그런 위험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중용과 정의, 그리고 겸손입니다.
이런 말이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물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유일한 말입니다. 왜냐 하면 이런 덕에 힘입어 사물을 올바른 지평에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현대 문화가 이런 덕을 약한 것으로 치부하고 배제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덕이 지닌 보다 깊은 의미를 보여주고 그 덕을 올바른 위치에 되돌려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겸손함은 자유가 가진 힘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생명에 어떤 방향을 부여하고,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어떤 중요성을 부여할 것인지를 분별할 줄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본질을 깨닫고 그 본질에 따라 살며, 반대로 생명의 깊은 의미를 숨기고 우리를 현혹시키려는 모든 것을 상대화할 줄 압니다. 또한 이성과 이성의 힘에 대한 깊은 신뢰를 회복하는 사람은, 단지 일부 특전적 계층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보편적 유산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힘쓰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은 우리에게 하나의 규범이 됩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2코린 12,10). 사도 바오로는 인간의 약함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강함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표지를 드러내 보여주시는 가르침의 장이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을 강하게 하는 것은 자기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도 아니고 과학이 주는 도구에만 의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뢰를 가지고 자신을 버림으로써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 인간을 강하게 해 줍니다. 병에 걸려 자신의 약함을 체험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참된 본질을 깨닫게 하고 그 질병에 대항할 힘을 가리켜줍니다. 우리 각자는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에 힘입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부름 받았고, 그럼으로써 무의미함과 부조리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건강의 권력’은 또한 건강이 없을 때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게 해주는 힘입니다. 병상에 누워 요양하는 동안에 발달하는 권력은 자주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을 얻게 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나약해 보이는 우리 내면 존재의 힘입니다. 그러나 건강의 힘은 생명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물음들은 단지 미사여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미래에도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상에 누운 환자의 마음속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물음일 것입니다. 이 물음들이 항상 겉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런 물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환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환자 안에 의미를 찾는 물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환자의 마음속이 아니라면 그 가족이나 친구들 안에 그 물음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적어도 한번쯤 무관심의 베일을 벗고, 현실에 대하여 묻고 마음을 자극하는 감수성을 되찾을 때 그들은 그 물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미래 시대는 의학의 인간화를 촉진하고 그것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화란 인간을 더욱 인간이 되게 하고, 자연과 역사 안에서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모든 것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이 지닌 본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인간화는 반드시 인간의 존엄성과 결합되어야 하며 그 존엄성에 합당한 존중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사회, 정치, 문화 활과 마찬가지로 의료에 있어서도 인간화는 책임을 짐으로써 각자가 존엄성을 갖고 매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삶을 살도록 하는 문제입니다.
진정한 인간화가 실현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환자가 자신의 질병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존엄성을 가지고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럴 때에 비로소 참된 의미의 자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삶을 보다 인간적인 것이 되게 하는 일은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극심한 고통 속에 죽었으나 그의 아버지 하느님의 힘으로 사흘 만에 부활하여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된 한 인간에 관한 구원의 말씀을 세상에 전할 사명을 받았을 때, 함께 받은 사명이자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목표를 분명히 바라보고 현대의 인간에 대한 성실함을 가지고 힘써 일하도록 합시다.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고통 중에도 맑은 눈으로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사랑의 열매를 바라보도록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합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건강의 가치와 질병의 약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건강의 권력’이 단지 소수만을 포용하여 과학의 혜택을 그들에게만 베푸는 일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 권력은 그 본성상 보편적인 시선을 가지며, 무엇보다 더 많은 복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이 권력은 그들에게 한줌의 희망을 제공해 주어 그들이 자신의 미래를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단지 운 좋은 몇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에 대한 권력’이 초래할 위험성은 이미 하나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을 지닌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 뿐입니다.
사실 이런 권력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그 권력을 지닌 이에게 오히려 해악이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를 자신 안에 내버려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학이 발달할수록 영적인 가치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어떤 의사가 마음의 건강/질병에서 출발하여 몸의 건강/질병을 효과적으로 알아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병은 바로 마음의 병이 아닐까요? 미래는 인간에게 존엄성을 돌려주어야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의 바깥도 아니고 위도 아닌, 바로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과 과학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회복하게 해줄 수 있는 강한 존중입니다.
■줄기세포-선과 악(코니 이브스)
대부분의 정상적인 성체 조직은 고도로 분화되어 있고 한정된 수명을 지닌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포들의 지속적인 존속은 궁극적으로 발육이 차단된 조직 제한적 ‘줄기세포’라는 작은 집단에 의존한다.
이 줄기세포는 자가-지속(self-perpetuate)으로 인해 줄기세포 집단의 규모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한 특정 조직에서 분화된 기능을 가지는 자손들을 발생시킬 수 있는 독특한 이중 능력을 지니고 있다.
‘줄기세포’의 특성, 기원, 조절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 현재 단일 세포 단계에서 순수 집단의 분석이 정기적으로 가능했던 혈액 계통에서 발전되었다.
더욱이 혈액 줄기 세포의 연구로부터 유래된 대다수의 개념과 원리들이, 유방과 같은 상피조직을 포함한 다른 정상 조직에도 유용하게 적용되고 있다.
줄기세포의 프로그램에 관한 지식은, 재생의학 적용을 통한 다양성으로 조직 대체라는 새로운 시도에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암은 무한하고 조절되지 않는 성장을 보이며 전형적으로 다소 분화가 억제되는 기본 특징을 지니므로 정상 줄기세포 행동을 조절하는 유전자가 암을 유발시키는 원인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정상 줄기세포 생물학을 이해하는 것은 종양발생의 기전을 설명하는 유력한 틀을 제공한다.
[인터넷중소병원] 기사입력 2009-04-29, 11:25
- Copyrights ⓒ 인터넷중소병원 & ihospital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